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누가복음 17:11~19)
예수님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굳게 결심하시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방향은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의 시간은 유월절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다리신 시간은 유월절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목적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우리의 죗짐을 다 짊어지시고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를 대속해 주시는 것, 우리에게 믿음으로 얻는 의를 허락해 주시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누가복음 17장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예수님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의 최종 방향은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왜 올라가십니까?
누가복음 18장 31절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요한복음 13장 1절도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성경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 바로 그분이심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이걸 증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이 오실 메시야를 예언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 나시고,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죄인들의 구주가 되신다고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유월절을 지켜 영원한 규례로 삼을지니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그렇게 구약성경에는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를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한 그대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대로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시고 율법의 마침이 되시려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주시려고, 지성소로 가는 길을 열어주시려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예수님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인데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예수님은 뜻하신 바, 의도하신 바가 있어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찾아가셨습니다. ‘지나가셨다’고 기록돼 있는데, 사실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시고 뜻하신 바가 있어 찾아가셨어요. 지도를 보시면 사마리아 가운데 있고 갈릴리는 위쪽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대에 있는 어느 마을에 나병환자가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들에게로 찾아가셨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크게 2가지입니다. 가운데 사마리아를 거쳐 가는 길로 가면 빨리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사마리아를 거쳐 가는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데가볼리를 거쳐 돌아서 가는 길로 다녔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싫어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17장 2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북이스라엘이 BC 722년에 망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제국에 정복당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앗수르제국에 망했는데 그 북이스라엘의 수도가 사마리아입니다.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앗수르 땅으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앗수르 사람들을 강제로 사마리아 땅에 끌고 와서 이주시켜 사마리아 땅에 살게 했습니다. 앗수르제국의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바와임 사람들을 강제로 사마리아 땅에 강제로 이주시킵니다. 그때부터 사마리아는 멸시의 땅이 됩니다.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의 땅이 되지요.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짐승 취급했습니다. “너희들은 유대인이 아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당연히 유대인들을 좋아하지 않죠. 서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만나기를 싫어했어요. 사마리아 길로 가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먼 길을 돌아서 가더라도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마주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서로 적대적인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뜻하신 바가 있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로 거쳐 가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어 일찍이 사마리아 수가라 하는 동네로 찾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도 의도적으로 찾아가셨는데, 그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이 나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물 좀 달라”고 먼저 말을 걸고 대화를 시작할 때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만큼 예수님 당시만 해도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는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싫어했습니다.
오늘 말씀 누가복음 17장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인데 그 길로 가시는 길에 뜻하신 바 있어 사마리아 길로,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대로 찾아가십니다. 거기에는 나병환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 위험한 지역에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슬프고 슬픈 사람들입니다. 살점이 썩어지고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얼마나 무섭고 끔찍합니까? 하용운 시인의 시를 보면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발가락이 하나 없어졌다’ 그런 구절이 있어요.
이 나병이라는 것이 요즘은 다 고치고 안전하지만 과거만 해도 얼마나 두려운 병이었습니까? 나병에 걸리면 집에서 살지 못합니다. 쫓겨납니다.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이 나타나면 외쳐야 합니다.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사람들이 자기 곁에 오지 못하도록 외쳐야 합니다. 얼마나 처량해요. 슬프고 슬픈 사람들 그 나병환자들이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함께 모여 살고 있었어요.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대,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는 그곳에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슬프고 슬픈 사람들 나병 환자들이 거기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뜻하신 바 있어 그들에게로 찾아가셨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대는 위험한 땅이었습니다. 언제 피 흘리는 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한 땅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은 사실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슬람 세력의 득세로 종교 전쟁까지 더해져서 갈등 양상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지금은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대는 위험한 땅이었어요. 그렇게 위험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오갈 데가 없으니까, 거기 모여서 서로 어울려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사마리아 사람도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상종하지 않는데 서로의 깊은 슬픔이, 서로의 깊은 아픔이 서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어울려 산 것 같습니다. 그들 곁으로 예수님이 찾아가셨어요. 이전에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수가성으로 가서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복음을 전하셨는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또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대에 모여 살고 있는 그 나병환자들 곁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대로 찾아가셨어요. 예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원도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차별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허락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갈등을 풀어내는 유일한 비결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님의 사랑 말고는 이 시대의 갈등을 풀 수 있는 길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주님의 그 사랑 외에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무수한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비결이 없습니다. 지금도 전쟁 중인 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을 푸는 비결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어요. 다른 데는 길이 없어요.
우리 한반도의 이 갈등을 푸는 비결이 여러분 어디에 있겠습니까? 갈수록 더 위험하고 복잡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길은 없어요.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님의 그 차별 없는 무한한 사랑, 그것만이 이 우리 시대의 갈등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교회가 무너지면 안 됩니다. 교회가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무너지면 소망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목숨 걸고 이 땅에 교회를 순수한 신앙의 전통 위에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의 진리에 세워진 교회를 여러분 끝까지 지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끝까지 잘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를 잘 지켜서 건강한 교회를 우리 다음 세대,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7장 12절과 1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대 나병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 그곳으로 예수님께서 찾아가셨어요. 10명의 나병환자가 나와서 예수님을 향해 고함을 지릅니다. 아마 이들은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분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다 고쳐 주신다 하더라.’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겠죠.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던 그 예수님이 찾아오신 거예요. 그러니 고함을 지를 수밖에 없어요.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함을 질러요.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자기들은 부정하니까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량한 몰골을 하고서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렇게 고함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외면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슬픔을 아시고 그들 곁으로 찾아가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4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님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로 가라. 가서 너희 몸을 보여라. 이 말씀을 하셨어요. 율법에 따르면 나병이 확실하면 제사장이 보고 부정하다고 선포합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당시에는 나병이 생기면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나병이 확실하다면 부정하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면 이제 집에서 쫓겨나 멀리 외딴곳에 가서 살아야 합니다. 나병이 나아도 제사장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제사장이 보고 깨끗하면 정결예식을 행하고 정결하다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직 나병이 낫지도 않았어요. 몸에 나병은 그대로인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세요.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라.” 여러분 여기에 무엇이 요구됩니까? 뭐가 필요해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주시고 믿음 위에 서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요구하시고, 그 믿음 위에 서게 하셔요.
아직 몸은 그대로인데, 아직 병이 안 나았는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제사장에게로 가라.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 하세요. 그 말씀 듣고 10명의 나병환자가 제사장을 찾아갑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어요?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어요. 믿음으로 순종하는 중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받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도 체험합니다.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권능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도 받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내 것으로 받아 누릴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믿음 없는 자 되지 말고 믿는 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7장 15절과 16절입니다.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0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그들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예수님께로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어요.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것은 인생이 달라진 것이요,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알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할 줄 알았던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고 성경은 강조해서 기록해요. 그런데 그 한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선민 의식은 책임의식으로 가야 하는데 선민 의식을 특권 의식으로 발전시켜서 교만하기만 했던 유대인들은 자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뭐가 중요합니까? 정말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냐,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냐, 이게 중요한 거예요. 유대인, 그거 자랑할 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마리아인이라는 사실, 그거 부끄러운 거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정말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냐, 정말 하나님의 은혜 입은 자라서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냐, 이게 중요한 거예요. 진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알고 진실로 주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마리아 사람이어도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멸시해도 괜찮습니다. 뒤에서 조롱하고 손가락질해도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안아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가난해도 괜찮고 병들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런 사람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유대인이어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모르면 그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 그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어도 하나님께 정말 영광 돌릴 줄 알고, 하나님 은혜를 감사할 줄 알고, 범사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직분을 자랑하지 말고, 신앙의 연수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믿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명령을 지켜 준행할 수 있는 오늘 이 시대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면 ‘나는 3대째 믿는 믿음의 사람이다. 나는 4대째 믿는 집안의 후손이다.’ 아무 소용없어요. 나는 목사입니다. 장로입니다. 권사입니다. 안수집사입니다. 그것도 소용없어요. 찬양대원입니다. 회장입니다. 임원입니다. 그런 것도 다 소용없어요. 유대인이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다. 청교도의 후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이 정통이다. 우리 신학이 정통이다.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의 후예들이다. 우리 그런 말을 많이 하는데요, 우리도 정신 차려야 돼요. 그런 것만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내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인가 이것이 더 중요해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알고, 하나님 말씀을 진실로 준행할 줄 아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인가,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17장 17절과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0명의 나병환자 중에 한 사람, 그 한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고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짐승 취급했던 그 사마리아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알고, 예수님 앞에 돌아와 무릎 꿇고 감사할 줄 알았다는 거예요.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제사장에게 보이러 가다가 몸이 나은 것을 알고 너무 좋아서 그랬는지, 너무 흥분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사라져 버렸어요. 예수님은 아직 안 끝내셨는데 자기들은 끝내버렸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아직 남아 있는데, 그들은 사라져 버렸어요.
원래 이렇게 생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욕심이 이루어지면 예수님께 금방 등을 돌려요. 이런 사람 많아요. 예수님은 사라져버린 아홉도 찾으셨습니다. 안타까워서 찾으셨어요. 예수님께서 정말 들려주기를 원하셨던 말씀은 따로 있었어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구원 얻는 믿음, 이 진짜 복을 예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셨는데, 나는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 갔느냐? 아홉은 어디 갔느냐? 예수님께서 안타까워서 찾고 계신 거예요.
여러분 진짜 복은 누가 받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아는 사람이 받습니다. 가장 큰 복, 가장 귀한 은혜는 누가 누립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받아서 누립니다. 여러분은 진짜 복을 받는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장 귀한 복을 받는 성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모르는 사람, 자기 영광만 구하는 사람, 사실은 자기 영광을 구하면서 입으로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배은망덕한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감사할 줄을 모르고 자기 욕심 따라, 자기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은 배은망덕한 사람이에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은 못 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복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아홉도 이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한 사람만 이 말씀을 들었어요.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직분을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통이다. 그런 거 너무 내세운 것도 아니요, 진실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믿음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자로서 감사하며 하나님 말씀 지켜 준행하는 믿음의 사람인가, 이것이 중요한 거예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 이거 가지고 있나 하는 거예요.
시편 49편 20절의 말씀 우리 큰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뭘까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요. 짐승은 하나님의 은혜를 몰라요.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몰라요. 하나님 말씀 지켜 준행할 줄 몰라요. 여러분 소나 돼지가 예배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지’ 그렇게 결단하고, 그렇게 하는 거 본 적 있습니까? 그런 소 있으면 우리 잡아먹으면 안 되죠. 그런 소는 없어요. 그런 돼지도 없어요.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뭐냐 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고, 하나님 말씀 지켜 준행할 줄 안다는 거예요. 이걸 모르면 사람이 짐승 같아요. 어떤 짐승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그 길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200만 명 함께 모여 부르짖어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큰 예배를 준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천지만물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 살게 하셨어요. 만물의 모든 것을 다 누리게 하셨어요.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모르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인간이 자기가 하나님 노릇하려고 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선악과를 범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범한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가 하나님 노릇하고 인간이 선과 악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살겠다는 거예요. 그게 원죄입니다. 그게 죄악입니다. 그것이 타락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지금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똑같이 지금 타락의 절정에 올라서고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죄라고 했는데 죄가 아니래요. 여호와 하나님 당신이 뭔데 우리에게 선과 악을 결정해 줍니까? 선과 악을 우리가 결정하겠나이다. 하나님이 죄라고 해도 그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일 뿐이고 우리가 죄가 아니라고 하면 죄가 아닌 거야.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 노릇하려고 해요.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선과 악을 결정하려고 해요. 하나님께서 죄라고 해도 죄가 아니라고 말하고, 오히려 법을 만들어서 그걸 합법이라고 말하고 ‘성경에 하나님이 이것을 죄라고 말씀했습니다’라고 말하면 처벌하겠대요.
오늘 우리 시대의 인간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우리가 살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의 잘못이라고만 해서는 안 되고 나의 잘못입니다. 우리의 잘못입니다. 우리가 잘못 살아서 그렇습니다. 통회하는 심정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에덴동산의 부패와 타락이 지금 재현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인간이 자기 맘대로 결정하겠대요. 오늘 우리 시대에 인간이 얼마나 교만해졌냐면,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착한 척합니다. “그거 인정해 줘야지, 인권인데. 포용해 줘야지.” 그렇게 말해요. 하나님보다 자기가 마음이 더 넓은 척해요.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지성적인 존재인 척해요. 하나님보다 자기가 사랑이 더 많은 척해요. 인간의 부패요, 타락입니다.
여러분, 엄청난 교만입니다. 타락의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가면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자로서 감사할 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준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걸 모르면 멸망하는 짐승같이 되는 거예요. 짐승처럼 가려고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 복음을 지켜야 하고 건강한 교회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 후손에게 건강한 교회를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에요.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의 진리에 세워진 건강한 교회를 우리 후손에게 물려줘야 합니다.
다원주의에 물들어 버린 교회, 병든 교회를 물려주면 안 됩니다. 나라와 민족도 무너져요. 인간성도 무너지고 가정도 무너지는 거예요. 저 유럽이, 미국이 이미 그 길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마지막 남은 보루예요. 여러분, 우리가 더 깨어 기도하고 이 땅의 교회를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순수 복음을 지켜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 반대로 우리 한국 교회가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믿음을 지켜서 이걸 보고 유럽의 교회도 회복되고, 미국의 교회도 회복되는 그런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더 깨어서 믿음 지키고, 우리도 정신을 차리고 믿음으로 살아서 정말 우리 다음 세대에게 건강한 교회를 물려줍시다. 교회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죽으면 다 무너져요. 윤리 도덕이 무너져요. 우리도 믿는 자로서 더 정신 차리고 세상의 소금으로서 빛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해서 성경 말씀에 기초한 올바른 윤리 도덕의 기초 위에 세워진 이 나라를 만들고 그런 나라를 우리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병든 나라를 물려주면 되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거예요. 우리 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내 잘못입니다”라고 회개하고 우리가 더 성령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여러분 우리 3가지를 기억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걸 기억하고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성경에서 말씀했어요. 이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나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사실은 내 영광을 구하는 것이고. 내 욕심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신을 차리고 던져버립시다. 그거 포기합시다. 이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면 여러분 목숨 바쳐 지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교회를 위하여’, 이게 교회를 세우는 것인가, 교회를 허무는 것인가를 질문하십시오. 교회를 위해하는 일이라면 당장 내려놓읍시다. 내가 손해 보는 일이어도 교회를 세우는 일이라면 우리 그 길로 목숨 바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피로 값주고 세우신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걸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우리 다산은혜교회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지구촌 곳곳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한 모든 신자의 모임이에요. 우리 그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제가 가끔 하나님, 우리 교회가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지키는 교회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잖아요. 그런 의미예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우리 다산은혜교회만이 아니에요. 지구촌 곳곳에,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정말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고 믿고 고백한 신자들의 모인 그 교회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예요. 우리 그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그 교회를 지키는 일에 쓰임 받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는 일이라면 우리 목숨발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남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 유익이 아니고 남의 유익을 위하여 성경이 말씀하세요.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솔직히 나는 나의 유익을 구해야지, 어떻게 내가 내 수준이 있는데, 내 인간성으로 그만큼은 나는 안 됩니다. 나의 유익을 먼저 구해야지, 내가 어떻게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솔직히 그거 어렵습니다. 그런 분들 계실 거예요. 저도 그렇습니다. 저도 사실 안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 돼야 하고 빛이 돼야 해요. 그래야 이 무너져 가는 한국 교회를 지킬 수 있습니다. 이 나라 민족도 살릴 수 있어요. 우리 힘으로는 못 하죠. 주님 안에 있으면, 주님이 힘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부모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자식들에게 더 좋은 거 줘야 하는데 늘 마음이 아프잖아요. 자녀로 사는 것도 힘들어요. 부모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데 그거 얼마나 힘들어요. 가장의 어깨는 날마다 무겁고, 남편도 힘들고, 아내도 힘들고 다 힘들어요. 이렇게 힘든 세상을 사는데 나 한 사람 먹고살기도 힘든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그것도 나의 유익이 아닌 남의 유익을 구하며 살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안 되지요. 그러나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이 우리 손 잡아 이끌어 주시면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그렇게 살아야 이 땅의 교회를 지키고 우리 다음 세대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세요.
그 예수님 안에서 살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교회를 위하여 살고, 나의 유익이 아닌 남의 유익을 구하며 살고 또 주님의 권능을 힘입어 그렇게 살 수 있음을 감사하고 우리 그렇게 오늘을 살고 내일도 살고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사명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축원합니다.